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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O녕_Free University of Berlin_2019학년도 2학기 파견

Submitted by Editor on 14 January 2021

I. 교환 프로그램 참가 동기

    

독일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염원의 자취는 고등학생 시절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 하필 그 시기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전체 도서관 규모에 비하면 정말 작디작은 그 3cm 내지의 책 모서리 표지가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우연이라면 우연, 필연이라면 필연으로 마주하게 된 그 오래된 책은 미래에 독일 유학이라는 장기간의 기획으로 나를 이끌었다.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했던, 철학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당시의 나로서 하이데거의 글은 마술과도 같이 느껴졌다. 단 한 번도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조차 해보지 못 했던 현상들을 그는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여전히 투사나 도래와 같은 날카로운 개념들을 처음 보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독일어를 전혀 몰랐지만, 주요 개념마다 표기된 각주의 설명을 통해서 삶의 가장 밑바닥의 차원에서부터 수집된 느낌을 말로 표현해내는 독일어 표현의 기발한 속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과연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아무리 대답을 찾으려 해봐도 그 앞에 놓인 절대적인 허무함에 할 말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때 하이데거가 보인 언어의 마술은 어쩌면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 내 나름의 언어를 통해서 대답을 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때는 전혀 깨닫지 못 했지만, 부족한 지식의 한계 안에서 하이데거를 통해 잠깐이나마 엿봤던 철학의 길은 독일에서 시작된 현상학 전통의 길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사정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그때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된 독일 철학의 강한 인상은 그 이후 나의 미래의 길을 찾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철학과 진입을 목표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진학한 이후 무작정 독일어 강의를 신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 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예전에 마음 깊숙한 곳에 심어졌던 그 씨앗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독일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도 매 학기 독일어 강의를 들었다. 군 복무 중에도 독학으로 독일어의 끈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철학과 학생이니까 별난 외국어 하나 정도는 해야지 하는 마음 정도 이상의 동기는 없었다. 그러다 2018년 1학기 복학했을 당시, 어쩌다 마주하게 된 한 강의가 그 동안 내가 희미하게 유지했던 독일어와의 연결고리를 독일 유학의 꿈이라는 거대한 목표로 확장시켜주었다. 바로 이남인 선생님의 현상학 강의였다. 그냥 잘 모르고 우연히 신청한 강의였다. 그런데 그 강의 첫 시간에 받은 인상은 고등학생 때 하이데거를 마주했을 때 받았던 인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삶을 소외시키지 않는 철학, 삶과 함께하는 철학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또한 그 강의에서 커다란 흥미를 자극했던 요소 중 하나가 독일어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었다. 독일 철학자 후썰 연구의 권위자이신 이남인 선생님은 후썰이 도입한 여러 개념들을 설명하시면서 삶의 가장 밑바닥을 끌어올리는 독일어의 독특한 특성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접하면서 독일 철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고, 졸업 후 석사학위를 독일에서 받아야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독일 유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징검다리 목표로 삼은 것이 독일 교환학생이었다. 미리 한 학기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어학 실력도 향상시키고 독일의 대학교 시스템이나 수업 환경에 대한 경험을 쌓는다면 후에 학위과정을 밟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목표를 정한 이후 교환학생 프로그램 지원 요건을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 독일어를 공부했고, 2019학년도 2학기 베를린 자유대학교에 파견되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게 되었다.

    

    

II. 세부 경험 내용

    

교환학생을 오면서 가졌던 목적이 언어 실력 향상과 대학교 생활 경험에 있었던 만큼, 그 두 가지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춰서 생활했다. 독일어를 최대한 많이 연습하기 위해 대학교 강의 4개 중 3개를 독일어로 진행되는 강의로 신청했다. 하나는 독일어 어학 코스였고 또 하나는 교수님이 앞에서 강의를 하시는 현대정치이론에 대한 대형 강의, 나머지 하나는 독일 대학의 강의형태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규모 세미나 수업으로, 독일 범죄소설을 다루는 수업이었다. 독일어로 진행되는 수업들 모두 따라가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식의 과한 훈련이 독일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독일어 코스 시간에는 대학 생활에 꼭 필요한 글쓰기와 발표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대형 강의를 통해서는 어려운 학문적 용어들이나 고급 표현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세미나 수업은 학생들의 참여를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생들 및 교수님과 독일어로 소통하면서 말하기와 듣기에 대한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다.

그 외에 언어교환 프로그램 또한 독일어 실력 향상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베를린 자유대학교에는 특별하게도 한국학과가 아주 큰 규모로 있는데, 학기 초에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언어교환 행사에 참여해 이 한국학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두 명의 학생과 친한 친구 사이가 되어 매주 각각 한 번씩 만나 서로에게 한국어와 독일어를 가르쳐주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친구들을 통해 많은 독일어 표현들을 익힐 수 있었다. 또한 반대로 내가 그 친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것도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 동안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못 했던 한국어의 여러 특성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친구들과 함께 독일어와 한국어의 차이에 관해 여러 차례 토론했다. 이를 통해 독일어는 맥락으로부터 독립적인 정교함을 추구하는 언어이며, 반대로 한국어는 맥락적이고 관계적인 사고를 상당히 강조하는 언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두 언어의 특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각 언어의 뒤편에 놓인 독일인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의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편, 언어적인 발전 이외에도 한국학과 친구들을 만났던 것은 그 자체로 아주 갚진 경험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한국 음식을 대접했고, 친구들은 독일 쿠키를 구워서 선물했다. 독일에서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기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기로 받아들여지는데, 그 시기를 독일 친구들과 함께 보내면서 여러 독일적인 문화와 함께 관련된 언어 표현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독일에 있으면서 언어 실력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보니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독일 석사과정 지원을 위해 필요한 독일어 자격 요건을 갖춰야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를 위해 동네 평생교육원 독일어 시험 준비 과정을 등록해 현재 다니고 있다. 2월 13일 시험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아직 시험을 보지 않은 상태인데, 반드시 합격할 각오로 준비에 임하고 있다.

독일어 공부 이외에 독일의 대학교 강의, 특히 철학과 강의를 들어보았던 것이 아주 값진 경험이었다. 이번 학기 철학과 강의로는 현대 정치 이론과 글로벌 철학 두 개를 신청해서 들었다. 이 두 강의는 실천철학 교육과정에 속한 강의들이다. 독일 대학의 철학과는 한국 대학과 다르게 대부분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을 나눠서 가르친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베를린 학생들이 더욱 관심 있어 하는 분야는 실천철학이다. 이 부분이 처음 나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국 대학에서는 대부분의 철학 강의들이 굳이 분류하자면 이론철학으로 분류되는 내용들을 다룬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만 해도 전공수업들 중 윤리학이나 사회철학, 정치철학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강의들이 이론철학적인 내용을 다룬다. 그런데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베를린의 많은 철학과 학생들이 이론철학을 실천철학을 공부하기 위한 밑거름으로서 생각한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이곳의 학생들에게 철학은 다른 어떤 이론적인 문제들보다도 이 시대와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행위하고 세계를 어떻게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사정과 크게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흥미를 갖고 실천철학 분야의 강의를 신청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강의는 글로벌 철학이었다. 강의를 맡으신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글로벌 철학은 최근에 들어서야 주목을 받고 있는 철학 분야로서, 단순히 서로 다른 문화권의 철학을 비교하는 비교철학적인 연구를 넘어서 현 시대 세계 공동체가 함께 마주한 글로벌적인 문제들 해결하기 위해 세계 곳곳의 이용 가능한 여러 철학 전통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열린 토론의 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 이번 강의에서는 자유주의 이론이 가진 빈부 격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교 전통의 이론을 사용한다던지, 서구권의 개인주의적 사고가 가진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기 위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의 공동체주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정교화 하는 등의 작업 등에 대해 배웠다. 사실 동서양의 철학을 두루 다루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교육받은 나의 입장에서 이렇게 다양한 철학 전통에 동시적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순히 여러 이론들을 함께 고찰해보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시대 우리가 공동으로 마주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여러 이론들을 이용하고 여러 갈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실천적인 자세는 이전에 쉽게 접해보지 못 한 것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그런 시도가 일어나고 있겠지만, 이렇게 공식적인 학문 분과로까지 발전시켜 학부 강의로까지 개설하는 사례는 쉽게 목격할 수 없었다. 글로벌 철학 강의를 통해 한 학기 동안 범세계적인 실천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교수님 및 학생들과 많은 토론을 했다. 세미나 수업이었기 때문에 교수님의 가르침보다 참여자들 간의 토론이 더욱 강조되어 더욱 많은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과거 세대가 범했던 우를 극복하고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인류의 공동 발전에 힘쓰려는 베를린 철학과 학생들의 강한 의지를 목격했고, 그들의 실천적 관심과 의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지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보다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공헌하는 것을 더욱 큰 목표로 삼고 철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교수님과 학생들을 보면서, 어쩌면 한국에서도 조금 더 생활과 직접적인 연결점을 가지면서 피부에 직접 와 닿는 실천철학이 지금보다 더욱 많이 연구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한국인들의 경우 이미 동서양의 철학에 두루 익숙하기 때문에 좋은 동기부여만 주어진다면 앞으로 글로벌 철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도 앞으로 철학을 공부해나가는 데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만한 분야를 알게 되어 커다란 수확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일어 책을 여러 권 읽은 것이 아주 주요한 경험이었다. 교환학생을 오기 전에도 독일어 책을 읽으려고 많이 시도했었다. 한국에서도 동화책 정도의 책이야 사전만 주어지면 별 문제없이 읽을 정도의 실력을 쌓긴 했지만, 학문적인 책을 읽으려면 한 페이지를 읽는 데만 해도 몇 십 분이 걸려서 거의 읽지를 못 했었다. 그래서 독일에 온 직후부터 독일어 소설이나 학술서적을 읽으려고 꾸준히 노력했고, 학교 강의에서도 독서 과제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독일어 텍스트들을 읽었다. 이러한 읽기 연습과 함께 전반적인 독일어 공부가 함께 시너지를 내면서 현재는 독일어 독서 속도가 한국어 독서 속도의 절반 정도에 이르렀다. 여전히 만족스러운 속도는 아니지만 이전에 비하면 아주 큰 발전이다. 또한 오류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프로이트나 후썰 등 난이도 높은 책들을 직접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어 원서에 나온 표현들을 직접 읽는 기쁨은 매우 크다. 모든 언어가 각기 자신만의 특징과 느낌을 갖고 있지만, 특히 독일어에는 영어나 중국어, 일본어 등에 비해 한국어로 번역되기에 까다로운 표현이 많아서 본래 표현을 직접 보는 것이 정확하고 풍부한 이해에 절대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교환학생 기간 동안 독일어 독해 능력을 크게 향상시킨 덕분에 나중에 상위 학위과정을 밟는 데 있어서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III.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마치는 소감

    

교환학생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 보다는 행복하고 보람찼던 순간이 훨씬 많았지만, 나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고 또 나 자신의 발전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타국에서 겪은 역경이다. 대부분의 역경은 부족한 독일어 실력에서 비롯되었다. 파견 이전 한국에서 언어에 대해 준비를 단단히 했고 또 가서 직접 실생활을 겪으면 금방 언어실력이 향상될 거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언어는 생각보다 단기간에 해결되는 그런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 6개월간 독일에 체류하면서 한국에 있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독일어를 잘 해진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학교 강의를 전부 다 이해하고 독일인들과 문제없이 소통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 했다. 부족한 독일어 실력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단순히 짐작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대학교 강의의 거의 모든 것을 이해했고, 원한다면 사람들과의 대화를 주도할 수도 있었으며,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다른 학생들보다 특별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언제나 강의의 절반 남짓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고, 친구와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아서 매끄럽지 못 했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독일 학생들에 비해 세 배, 네 배의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부족한 독일어 실력으로 인해 나는 처음으로 뒤쳐지는 학생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주변 학생들에 비해 여러 부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동료 학생들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사실 많은 독일인들이 영어를 준수하게 구사하고 특히 베를린은 국제도시인지라 영어로만 소통해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영어로 소통하면서 조금 더 편하게 생활할 수도 있었다. 대학교에서도 영어 강의 위주로 수강신청을 했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강의를 따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교환학생을 온 가장 큰 목적이 독일어 실력을 쌓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독일어를 써야만 하는 상황에 내 자신을 많이 노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러한 당찬 도전의 발을 내딛으면서 기대했던 바에 비해서 성장 속도가 한참 느리다보니 기대와 현실의 간극 속에서 많은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이러한 뒤쳐짐의 경험이 조금 더 겸손한 자세를 갖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나 혼자서 대부분 일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줄곧 갖고 있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러 일들을 해나가는 데에 있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그런 면은 잘 보려하지 않고 성취가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 덕분이기보다는 결국 내 자신이 열심히 해서 얻은 결과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강의시간에 좋은 내용을 얻어가도 교수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라기보다는 내가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또한 동료 학생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 없이 나 혼자서 공부를 통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모든 것들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언어문제 때문에 선생님들과 주변 학생들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고, 말하기 실력이 부족하다보니 대부분 사안들에서 먼저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모두가 각각 나름대로 가치 있는 생각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생각들에 충분히 귀를 기울임으로써 내가 혼자서 내놓는 성취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는 줄 세우기 식 사고를 철학 분야에까지 적용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일등이 이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철학분야에까지 적용해서, 최고의 권위자들이 하는 말이 아니면 별로 가치가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권위자들의 책이나 강의 이외에 다른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내 주변에 불필요한 벽을 쌓아왔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부족한 언어실력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해로운 벽을 스스로 허물고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막상 그렇게 소통의 공간으로 나와 보니 밖의 세상은 훨씬 더 밝고 풍성했다.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혼자서 공부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각도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길을 탐색할 수 있었다. 주변 학생들로부터 독일어뿐만 아니라 실천철학에 대한 부족한 지식 부분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지나치게 독자적인 성과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철학분야의 성취에서도 훨씬 더 많은 장점을 갖는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지금처럼 여러 문화권의 접촉이 갈수록 늘어가는 시대에서라면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참조하는 것이 지구촌의 실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필수불가결 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이 소통의 문제를 나 자신의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 사람들 모두가 베를린의 특징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 ‘물티쿨티(multi-kulti)’라는 말이 있다. ‘다문화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베를린에는 과거 냉전시절부터 서쪽에는 터키인들이, 동쪽에는 베트남인들이 매우 많이 이주했다. 그 이후에도 서아시아나 아프리카로부터 수많은 난민들이 유입되었고,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학문과 예술을 위해 아주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물론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양한 사람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데에는 베를린에서 철학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베를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실천철학에 관심을 갖고 열린 토론에 나서려고 한다. 사회 윤리와 관련된 많은 행사들이 주최되고, 대학교 강의에 일반 시민들이 꽤 많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런 지적인 관심과 노력 안에서 노골적인 차별이나 집단적인 묵살이 억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존중의 분위기가 비교적 잘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한국 사회는 아직까지 많은 문화권들과의 접촉에 비교적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한국에도 아주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아직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공존과 소통의 문제가 표면 위로 많이 올라와있지는 않은 상태다. 그러나 세계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우리나라 역시 저출산 등의 문제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사회 안으로 외국인들을 어떻게 포용할 것이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소통의 문제가 핵심적인 요소로 떠오를 것이다. 우리 사회 안에서 이미 살아가고 있는, 또 앞으로 밀려들어올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없다면 심각한 문화적 갈등과 함께 실질적인 위험이 사회 도처에서 폭발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건전한 소통과 열린 토론의 장을 만들어나가는 데에 철학계가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베를린에서와 같이 철학이 적극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면 훨씬 더 좋은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베를린에서 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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