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교환 프로그램 참가 동기
크게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교환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첫째는 ‘미친 듯이 영문학 읽기’, 둘째는 ‘풍부한 여행’, 셋째는 ‘창작에 골몰하기’였습니다. 영문학의 본고장인 영국에서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 카즈오 이시구로를 배출한 학교에 다니고, 그곳의 만만치 않은 커리큘럼에 제대로 임해 좋은 책들을 많이 읽어보는 것; 한국의 지리적 위치상 쉽게 가볼 수 없는 유럽의 온갖 명소들을 돈이 허락하는 대로 마구 방문해보는 것; 그리고 문예 창작 수업을 들으면서 매주 글을 쓰고, 교수님과 학생들로부터 크리틱을 받으며 글쓰기 실력을 일취월장시키는 것.
II. 세부 경험 내용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수업을 들었습니다.
(1) 금서들 (Banned Books): 3학년 대상 수업입니다.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유들로 출판이 금지되었던 20세기의 뛰어난 영문학 작품들을 읽는 수업입니다. 물론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의 시대?사회적 맥락을 짚어가며 출판 금지의 원인들을 분석하기도 하고, ‘문학 작품의 뛰어난 예술적 가치가 그 작품이 출간되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와 같은 원론적인 질문들을 놓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저 수업의 매력적인 이름에 이끌려 신청했다가는 매주 1권의 장편소설을 읽어야 하는 고된 로드와 끊임없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세미나 형식의 수업 탓에 쉽게 지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양의 방대함 때문에 수업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결코 읽을 엄두도 못 낼 『악마의 시』(살만 루쉬디)와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탐독할 수 있고, 『채털리 부인의 연인』(D. H. 로렌스)과 같이 기존 문학의 풍토를 완전히 거스르는 유명 작가들의 담대한 시도들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들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제작 『로리타』의 출판을 놓고 찬반 토론을 벌이는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2) 현대 영화와 희곡 (Contemporary Film and Drama): 3학년 대상 수업입니다. 종교, 우주, 발라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임상실험, 약물중독 등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는 21세기의 걸출한 희곡들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입니다. 강의명과 달리 영화는 3-4주에 한두 편 정도 감상하는 수준에 그치지만 영화에도 조예가 깊으신 교수님의 선택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모두 흥미로운 작품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수업 역시 매주 두 편의 희곡을 읽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 만만한 로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21세기의 영미 희곡들을 수업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기에, 또 희곡이 얼마나 폭넓은 주제들을 색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기에 수강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 문예 창작 서설 (Creative Writing: Introduction): 1학년 대상 수업입니다. 오감, 캐릭터, 내러티브 등 창작에서 필수적인 이론들을 배우고, 수업에서 진행되는 간단한 창작 과제들(이를테면 엽서를 읽고 나서 그 엽서를 작성하거나 받은 인물의 입장에서 간략한 편지를 써 보는 것)부터 인물의 내적 독백(Internal Monologue), 학기말에 가서는 자신만의 작품(시, 소설, 희곡·시나리오 중 어떤 장르도 상관없습니다)을 쓰는 시간을 가집니다. 아마 교수님별로 수업이 판이하게 진행되는 것 같은데, 저의 경우에는 이론적 설명의 비중이 굉장히 적었고 강의실에 앉아서 주어지는 과제를 직접 수행하고 학생들 간에 상호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교수님의 설명이나 개입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수업에서 배워가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쓴 작품을 공유하고 그 자리에서 피드백을 받아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기에 한 번쯤 수강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이 없는 날들에는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혹은 유럽에 파견된 한국 교환학생들과 만나 여행을 다녔습니다. 영국 국내에서는 대학교가 위치한 노리치, 런던은 물론 캠브리지, 브라이튼, 브리스톨, 도버와 같은 곳들을 방문했습니다. 북적이는 도시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도버처럼 한적하지만 뛰어난 자연 풍광을 자랑하는 곳들도 방문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리어왕』이나 매튜 아놀드의 「도버 해변」을 인상 깊게 읽은 영문학도들이라면 꼭 가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 여행을 부지런히 다녔기에 국외로도 많은 곳들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과 신트라, 프랑스의 리옹과 니스, 독일의 베를린,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말린 헤드를 방문했습니다. 딱히 어떤 장소를 꼬집어 꼭 방문해보라고 말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모두 좋았는데, 특히 유럽의 서단인 cabo de roca에서 바라본 일몰, 니스의 샤갈 미술관과 푸른 바다, 베를린의 세련된 분위기와 영화제, 더블린의 조이스 낭독회와 말린 헤드의 아름다운 바다 정경이 기억에 남습니다.
III.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마치는 소감
수업, 여행 모두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노리치에서의 생활, 그리고 이곳에서 교환학생들과 쌓은 인연입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미국, 호주, 캐나다, 그리스, 홍콩,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에서 온 학생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몇 시간씩 수다를 떨고, 텔레비전을 보고, 식사를 하고, 펜케이크를 만들고, 술을 마시고, 클럽에 가고,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먼 미래에 이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세계 어딘가에서 한데 만나 그동안의 회포를 풀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